트럼프가 2016년에 처음 당선되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이상 현상이라고 불렀죠. 러시아의 개입, 힐러리의 실수, 미디어의 오판이 겹친 일회성 사고라는 해석이 지배적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비슷한 반응이 많았죠. "어떻게 저런 사람이 대통령이 되나"라는 당혹감 뒤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깔려 있었습니다. 교육 수준이 낮은 백인들이 선동에 넘어갔다는 거였죠.
하지만 2024년 트럼프가 다시 당선되었을 때,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같은 사람이 두 번 당선된 걸 일회성 사고라고 할 수 없죠.
1990년대 빌 클린턴의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는 선거의 핵심을 정확히 짚은 캐치프레이즈였습니다.
NAFTA 체결, 금융 규제 완화, WTO 가입 추진으로 대표되는 클린턴식 세계화는 GDP 성장률을 끌어올렸지만 그 성장의 과실이 누구에게 돌아갔는지가 문제였죠. 미국의 생산성은 꾸준히 올라갔지만 중위 실질임금은 거의 제자리걸음이었고 하위 10퍼센트는 오히려 줄어들었습니다. 성장의 열매는 월스트리트와 실리콘밸리로 집중되었고, 오하이오·미시간·펜실베이니아의 제조업 노동자들은 공장이 멕시코와 중국으로 떠나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봐야 했습니다.
경제학자 앤 케이스와 앵거스 디턴이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고 이름 붙인 현상이 이 시기부터 가시화되었습니다. 러스트벨트 백인 노동자 계층의 기대수명이 실제로 줄어들기 시작했고, 마약성 진통제 오피오이드가 그 자리를 채웠습니다. 러스트벨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터전이 해체되는 것을 지켜봐야했죠.
러스트벨트의 많은 유권자들은 오바마를 두 번 지지했습니다. 흑인 대통령을 두 번 선택한 사람들이 갑자기 보수화돼 트럼프를 찍었다는 설명은 설득력이 없습니다. 그럼 뭐가 바뀐 걸까요?
트럼프는 러스트벨트 유권자들에게 구체적인 경제 서사를 제공했습니다. 중국이 미국의 제조업을 훔쳐 갔고, 멕시코가 공장을 가져갔으며, 자신이 관세와 협상으로 그것을 되찾아오겠다는 이야기였습니다. 사실과 다르더라도 적어도 노동자 계층의 절망을 나는 알고 있고 내가 해결하겠다는 메세지를 던졌죠.
민주당은 뭘 내놓았을까요? 재교육 프로그램, 그린 에너지 전환, 그리고 미래의 일자리였습니다. 40, 50대에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에게 코딩을 배우라는 메시지는 현실을 외면한다는 인상을 줄 뿐이었죠.
공화당은 레이건 이후 감세와 규제 완화로 대기업과 부유층을 대변하는 노선을 굳혔습니다. 민주당 역시 클린턴 때부터 월스트리트와 손잡으면서 노동자 계층의 경제적 이해를 실질적으로 대변하지 못했죠. 골드만삭스 출신의 루빈 재무부 장관이 금융 규제 완화를 주도했고 이런 관행은 오바마 행정부까지 이어졌습니다. 2008년 금융위기 때 월스트리트는 막대한 공적 자금으로 구제받았지만, 집을 잃은 서민들은 구제받지 못했습니다.
기성 정치에 대한 불신은 SNS와 만나 더욱 심화되었죠. 과거에는 언론이 공론장의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알고리즘이 만든 필터가 각자가 믿고 싶은 정보만을 강화합니다. 기성 시스템에서 소외된 이들은 알고리즘을 통해 자신들의 분노를 정당화하는 정보에만 노출되고, 이는 전문가들이 틀렸다는 경험과 결합해 기성 제도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습니다. 양당 모두 자신들을 대변하지 않는다는 인식이 굳어진 이들에게, 기성 정치를 다 뒤집겠다는 트럼프의 메시지는 유일한 대안처럼 들릴 수밖에 없었죠.
트럼프의 두 번째 당선을 이해하려면 민주당의 변화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민주당은 노동자 계층의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는 대신에 정체성 정치와 문화적 진보주의로 방향을 틀었죠.
마이클 샌델 교수가 분석했듯이 민주당 엘리트들은 능력주의의 덫에 빠졌습니다. 고등 교육을 받은 자신들의 성공은 오로지 능력 덕분이며, 낙오된 이들의 고통은 그들의 부족함 때문이라는 오만한 태도가 바탕에 깔리게 되었죠.
이는 데이터로도 확인됩니다. 2024년 선거에서 대학원 이상 학위 보유자의 약 65%가 해리스를 지지했고, 민주당 지지자 중 대학 졸업자 비중은 2016년 43%에서 2024년 48%로 꾸준히 올라왔습니다. 스스로를 서민의 정당이라 부르면서, 실제 지지 기반은 점점 더 고학력 전문직 연합으로 재편되고 있죠.
이 구조가 만들어진 데도 이유가 있습니다. 민주당의 자금줄과 활동가 기반이 대학 캠퍼스, 미디어 업계, 실리콘밸리로 집중되면서, 이 계층이 당의 의제를 사실상 생산하게 되었죠. 학계는 정체성 이론의 공급원이 되었고, 미디어는 그걸 증폭시켰고, 실리콘밸리는 자금과 플랫폼을 제공했습니다.
과거 민주당 내부에서 노동자 계층의 경제적 이해를 대변하던 균형추는 노동조합이었습니다. 하지만 민간 부문 노조 조직률이 1970년대 약 25%에서 현재 6%대로 붕괴하면서 그 목소리는 사라졌죠. 남은 건 공공부문 노조였는데 이쪽은 오히려 고학력 전문직 친화적 성향이 강합니다. 자금줄과 활동가 기반이 특정 계층으로 쏠리면 그 계층의 언어와 우선순위가 자연스럽게 당의 언어가 됩니다. PC주의(정치적 올바름)는 이 계층 내부에서는 당연한 규범이지만, 그 바깥에서는 사치스러운 관심사로 들립니다. 노동자 입장에서 젠더 중립 화장실 논쟁보다 공장이 왜 폐쇄되었는지가 훨씬 절박한 문제인 것은 당연하죠.
이미 정착한 이민자들 사이에서는 사다리 걷어차기 심리도 작용했습니다. 자신들은 합법적인 절차를 밟아 어렵게 정착했는데, 무분별한 신규 이민 유입이 자신들의 일자리와 지역 사회의 안정을 해친다고 느낀 거죠. 2024년 선거에서 히스패닉 남성의 약 54퍼센트가 트럼프를 지지했습니다.
포퓰리즘의 가장 강력한 연료는 이민 문제입니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면 저숙련 이민자의 대규모 유입이 같은 계층 노동자의 임금을 압박한다는 경제학적 근거는 실재합니다. 러스트벨트 노동자 입장에서는 공장은 떠나고 남은 일자리는 이민자와 경쟁해야 하는 이중 압박을 느낍니다. 세계화로 한 번 배신당한 이들에게 대규모 이민은 두 번째 배신처럼 다가오죠.
문화적 정체성 불안은 더 복잡합니다. 수십 년간 살아온 동네의 언어가 바뀌고, 학교 구성이 달라지고, 익숙했던 공동체의 풍경이 빠르게 해체되는 감각을 단순히 인종차별로 환원하기 어려운 이유는 변화의 속도와 방향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무력감이 바탕에 깔려 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자란 동네가, 자신의 나라가 자신도 모르는 방향으로 변해가는데 그 감정을 표현하면 인종차별주의자로 낙인찍히는 구조가 만들어집니다. 트럼프는 이런 감정을 억누르는 대신에 거칠게나마 공개적으로 말해주는 유일한 정치인이었죠.
여기에 인구통계적 현실이 더해집니다. 미국은 2040년대 중반이면 백인이 전체 인구의 절반 이하가 되는 구조적 전환점에 들어섭니다. 민주당 엘리트들은 이 변화를 다양성과 혁신의 계기로 받아들입니다. 백인들에게는 자신들이 주류였던 세계의 해체로 다가오죠. 둘 다 같은 사실을 보고 있는데 해석이 180도 다릅니다. 이 불안이 인종주의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실재하는 감정이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죠. 어떤 집단이든 자신의 문화와 규범이 주류에서 밀려난다고 느낄 때 방어적 반응이 나오는 것은 보편적인 심리입니다.
트럼프는 이 지점을 영리하게 파고들었죠. "Make America Great Again"은 천재적인 슬로건입니다. 언제의 미국인지를 특정하지 않죠. 러스트벨트 노동자에게는 공장이 잘 돌아가던 시절로, 백인 중산층에게는 교외가 안정적이던 시절로, 각자가 잃어버렸다고 느끼는 세계를 투영할 수 있습니다. 인종을 직접 언급하지 않으면서도 경제적/문화적 불안을 동시에 흡수하는 구조입니다. 이민 문제를 찬성과 반대, 혹은 인도주의와 인종차별의 이분법으로만 다루는 한 그 공백은 포퓰리스트가 채우게 됩니다.
또한 MAGA를 단순히 "공화당의 극우화"로 보면 본질을 놓칩니다. 마가는 공화당을 장악한 별개의 운동에 가깝죠. 기존 공화당은 월스트리트, 복음주의 교회, 헤리티지 재단 같은 보수 싱크탱크를 기반으로 한 하향식 구조였습니다. 당 엘리트들이 의제를 설정하고, 감세/규제 완화/강한 국방이라는 레이건식 패키지가 30년간 당의 정체성이었습니다. 마가는 그 구조를 우회했죠. 트럼프는 트위터로 지지층과 직접 소통했고, 팟캐스트·유튜브·틱톡 생태계가 주류 미디어를 대체했습니다. 조 로건 같은 인플루언서가 CNN보다 더 많은 유권자에게 닿는 구조가 만들어졌고, 오프라인 집회는 종교 부흥회에 가까운 감정적 결속의 장이 되었습니다.
이념적으로도 결이 다릅니다. 기존 공화당은 자유무역과 친기업 노선이었지만, 마가는 보호무역/반이민/반엘리트를 내세웁니다. 2016년 공화당 기득권이 총동원해 트럼프를 막으려 했던 것도 이 때문이죠. 결국 트럼프와 마가 진영은 공화당을 바깥에서 점령한 셈입니다.
트럼프는 어떤 의미에서 미숙한 마가 1세대 포퓰리스트입니다. 구조적 불만이 해소되지 않는 한, 더 정교한 이론을 갖춘 후계자는 나오기 마련이고, 밴스 부통령이 그 예입니다. 그는 트럼프의 분노적 언어를 이념적으로 정교화하고, 이 생태계를 어떻게 활용해 제도를 장악할 수 있는지를 학습한 인물이죠.
결국 문제는 단순합니다.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것을 해결해 줄 것처럼 보이는 이에게 표를 던집니다. 오바마를 두 번 찍고 트럼프를 찍은 유권자들은 무지해서 속은 건 아니죠. 자신들의 현실을 진지하게 다루는 후보가 트럼프밖에 없었기 때문에 트럼프를 선택한 겁니다. 그게 합리적 선택인지 아닌지는 별개의 문제죠.
유럽의 사례를 보더라도 세계화의 패배자들이 기성 정당들은 자신들을 대변하지 못한다고 느낄 때 포퓰리즘이 그 공백을 채우는 패턴은 글로벌 현상입니다. 프랑스의 르펜, 이탈리아의 멜로니, 헝가리의 오르반. 이들의 공통점은 기성 정치가 외면한 계층의 감정을 정면으로 다루었다는 점입니다.
설령 트럼프가 몰락하더라도 그를 만들어낸 토양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세계화의 과실이 여전히 편중되어 있고, 양당이 노동자 계층을 실질적으로 대변하지 못하고, 민주당 엘리트들이 PC 복음주의에 열중하는 한 제2, 제3의 트럼프는 예고된 수순이라고 생각합니다. 트럼프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시작일 지도 모르죠.